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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s Otiosus, 2008

정치영의 회화는 여느 포토리얼리즘 작가들처럼 사진이 모티프다. 그런데 그의 회화 속 사진 이미지는 흔히 보는 포토리얼리즘 회화와 달리 좀처럼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닮기 경쟁이라도 하듯 잔혹할 정도로 묘사적이고, 자극적인 포토리얼리즘적 속성이 그의 회화 속에는 없다. 오히려 작품을 보고 돌아서는 순간, 그 아련한 영상마저도 캔버스가 삼켜버릴 것 같다. 정치영 회화의 이러한 특징을 회화적 '잔영'이라고 부른다면 무리가 있을까?

정치영 회화에서 이 ‘잔영’은 그에게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하나는 포토리얼리즘에 있어 회화와 사진의 모호한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혹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았던 영웅을 제거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는 방법과 소재(주제)라는 측면에서 맞닿지 않는 평행선상에 있지만, 정치영은 이 ‘잔영’을 통해 이 두 가지의 속성을 하나로 묶어낸다.

수백 년간 이어온 회화의 시각적 재현에 대한 절대적 위상은 사진의 등장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회화의 오만함은 과학적 테크놀로지 앞에 무릎 꿇고, 사진은 마치 회화의 거대한 역사를 조롱하듯 회화를 밀어내고, 닮기의 제왕으로 군림한다.

하지만 다행히 사진과 회화의 닮기 전쟁은 회화의 목적이 닮음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고, 회화는 새로운 회화적 환경 모색을 위해 이합집산을 이루며 여러 가지 실험을 단행한다. 급기야 그 실험은 사진을 회화로 끌어들이는 포토리얼리즘에까지 다다랐다. 이러한 현상은 사진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제 회화는 사진을, 사진은 회화를 닮아간다. 물론 회화에 있어서 포토리얼리즘은 단순한 사진 닮기가 아니다.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환경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경계가 모호하여 포토리얼리즘 본연의 의도와는 달리 형식적인 ‘사진 닮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치영은 여기서 그 경계를 분명히 한다. 사진을 모티프로 하지만 사진이 잡아낼 수 없는 회화적 영역에 주목한다. 특히 정치영이 추구하는 사라지는 듯한 ‘잔영’의 중간 색조는 카메라 렌즈가 광학적으로 잡아낼 수 없는 미묘한 색채 조합과 변화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파스텔 톤의 단색조 이미지 구축은 회화이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그것이 데이빗 호크니적인 회화적 사실주의를 지향하지 않는 정치영의 포토리얼리즘이 단순한 사진의 재현으로 느껴지지 않는 결정적 단서들이다. 그 과정을 통하여 그는 포토리얼리즘의 회화적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으며, 회화적 순수성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회화적 가능성은 시대의 영웅을 없애고자 하는 정치영의 궁극적인 예술적 목표에 힘을 실었다. 그의 ‘영웅’들은 그의 ‘잔영’과 함께 그의 ‘회화’ 속에서 처절하리만큼 애처롭게 희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어린 시절, 세상을 구원할 희망처럼 여겼던 영웅. (그것은 영화 혹은 만화 속의 캐릭터일 수도 있고, 역사 속의 인물일 수도 있고, 정치가일 수도 있고, 나날이 발전해 가는 과학기술일 수도 있다.) 매스미디어의 범람 아래 우리가 동경해마지 않았던 그 영웅들이 현실 속에서 더 이상 현실이 아닌 한갓 가공된 영웅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허탈감이 그의 회화 속에 녹아 있다. 그 표현이 강력한 메시지가 아니라 현상을 왜곡하지 않은 아련함이기에 더 애절하다. 차마 영웅을 부정하지 못하고, ‘잔영’을 이용하여 존재 자체를 ‘없음’의 상태로 환원시키려는 작가의 염원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영웅이 자신의 손에 의해 퇴색되고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정치영이 자신의 회화에서 포토리얼리즘의 회화성 획득과 영웅의 제거라는 두 가지 과제, 혹은 그 이상의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있다. 회화적 ‘잔영’ 처리와 단색조의 화면 구축은 과정으로서의 소기의 목적에 도달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문제들은 그의 삶과 회화, 더 나아가서는 현대미술이 풀어야 할 과제들로 남아있다. 여기서 지금 이상의 무엇을 바라는 것은 그가 제거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영웅’을 만드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금 회화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아닌 회화성 획득이라는 회화 고유의 과제를 풀 수 있는 그 날이 기다려지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이근용(전시기획,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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